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2024년 2월 20일 일곱 가지 요구안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과학적인 의사 수급 추계를 위한 기구를 설치하고 증원과 감원을 같이 논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1년이나 지났지만 이제라도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에 입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서론
과학적으로 의사 수급을 추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설, 변수, 모형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의사 수급을 추계할 기관 혹은 연구자를 선정해야 한다. 추계된 결과를 검토하여 정책에 반영할 것인지 수정할 것인지 논의 후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 결과가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의료 수요와 필요, 그리고 공급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얼마만큼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것인지 그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은 얼마나 지불할 것인지 등의 사회적 합의가 수반되어야 하며, 이러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보건 의료정책과 의사 수급에 대한 방향성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료 수요와 의료 비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의사 수급을 추계해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를 구성하기 앞서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했다. 의약분업 사태가 있었던 2000년, 보건의료기본법이 제정되었다. 보건의료기본법 제15조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건의료발전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여야 한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보건복지부는 보건의료 발전계획을 단 한 차례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역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사상 첫 회의가 개최되었다. 보건의료기본법 상 보건의료발전계획에는 먼저 기본 목표와 추진 방향이 포함되어야 한다. 즉, 의료 수요·필요·공급에 대한 사회적 합의부터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 이미 법에 명시되어 있었지만 그간 정부는 직무를 유기한 셈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반목해온 의정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는 그간 당연 지정제와 단일 보험을 기반으로 의료 공급자를 통제하는 정책만을 고수해왔다. 더불어 정부는 의사들이 이윤 추구에만 몰두한다고 오도했다. 불합리한 의사 결정 구조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는 원가 이하의 의료비를 강요하고 있다. 현 사태와 관련하여 2020년 의정 합의를 준수하지 않았고, 전공의에게는 여전히 주 72시간 근무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제는 비급여 진료마저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의약분업, 문재인 케어, 의학전문대학원 전환, 의대 정원 확대까지 모두 의료계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행했으며, 정책 실패의 원인을 의료계로 돌렸다. 정부를 향한 의료계의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 수급을 추계하기 위해서는 의료 이용, 인력 분배 등 다양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의사수급추계위원회 구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된 바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 국한하여 최소한의 요건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나
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구로 운영되어야 한다. 2024년 10월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의료인력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for Medical Manpower Planning, ACMMP)의 전문가들 역시 정부의 개입 없이 독립적으로 의료 인력 수급을 추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은 이러한 독립성과 거리가 멀다. 지난 2024년 2월 6일 오후 2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실질적인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 결정을 통보하는 수준에 그쳤다. 불과 1시간 후인 오후 3시, 조규홍 장관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정책을 발표했다. 1시간 남짓한 논의 끝에 결정된 이 정책은 의료 인력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할 때,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와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법안들은 의사 수급 추계를 심의 의결하는 위원회를 보건복지부 산하에 두고, 위원장 역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거나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위원회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의사 수급추계위원회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출한 결과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 상위 의결 기구에서 다시 심의·의결하는 구조에서는 정부가 그 결과를 무시하거나 수정하여 임의로 결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서명옥, 안상훈 의원의 보건의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의사 수급 추계를 정부 출연기관이나 공공기관이 담당하도록 고정하고 있다. 즉, 정부 산하 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수급 추계를 위탁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정부의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의사 수급 추계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나 연구자가 수행해야 하며, 수급 추계 기관 및 연구자 선정 과정 또한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서 전문가들과 논의하여 결정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또 하나의 사례로,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대한병원협회가 운영을 위탁받고 있으며, 위원장과 위원 모두 보건복지부 장관이 임명하는 구조다. 보건복지부 및 대한병원협회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채 운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공의 노동력 착취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역시 같은 이유로 수련환경평가위원회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역시 정부의 개입을 없애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의료 인력 수급 추계를 위해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의사수급추계위원회의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 산하가 아닌 민간 기구로 운영해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정부 산하 기관이 아닌 민간 기구로 운영되어야 한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사례를 보면 민간 주도의 독립적 운영이 충분히 가능함을 알 수 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한국의학교육협의회가 주축이 되어 민간에서 시작했으며, 현재까지 정부와 의료계 양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사회는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뿐만 아니라 교육·언론·법조계 등의 공익 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고등교육법 및 하위 시행령을 통해 조직과 평가 인증의 법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세계의학교육연합회(World federation for Medical Education, WFME)의 평가 인증 기준을 도입하여 의학교육 평가·인증 기관으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국내 의학 교육 선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전문가 중심으로 민간 자율로 운영되는 기구의 모범적인 사례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간 자율 운영이 가능하다. 정부가 과학적인 추계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료(raw data) 제공 및 예산 지원 등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전문가들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하고, 위원회의 심의·의결 결과를 정책에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되고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 운영이 보장될 때, 의사 수급 추계가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정부 산하 기관이 아닌 독립적인 민간 기구로 운영되어야 한다.
둘
의사 수급 추계는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서는 가설 설정, 변수 결정, 모형 구축, 연구 기관 선정, 결과 검토, 정책 제안 등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다. 특히 변수 설정은 의사 수급 추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연구 논문에서도 근무일수 설정에 따라 의사 수 추계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네덜란드의 의료인력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for Medical Manpower Planning, ACMMP)의 사례를 보면, 근무 시간, 근무 형태, 성비, 외국인 의사 유입, 은퇴 연령, 미래 의료 수요 변화 등 50개 이상의 변수 분석하여 추계를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수급 추계를 위해서는 위원들의 충분한 전문성과 현장 경험을 갖추어야 한다.
위원회의 과반을 의사로 구성해야 한다.
의료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이 배제되면 불신과 갈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불합리한 의사 결정 구조다. 이 위원회는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한국소기업소상공인연합회, 농협중앙회, 전국민주 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25인으로 구성되지만, 대한의사협회의 참여 위원은 고작 2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조에서 의료 현장의 목소리가 적절히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의료 행위의 원가 보전율은 여전히 70~8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중증외상센터의 경우, 사람을 살릴수록 적자가 발생하는 구조가 지속되면서 이국종 아주대학교병원 외상외과 교수가 병원을 떠났고, 최근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은 중증외상 전문의 수련 센터 운영을 중단했다. 결국, 의료 전문가의 의견이 배제된 정책 결정 과정이 필수 의료 분야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다.?
일본 의사수급분과회는 전체 22명의 위원 중 16인을 의사로 구성하여 전문가 중심의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 결과를 존중한다. 주목할 점은 일본과 네덜란드 모두 정부뿐만 아니라 환자 단체, 시민 단체, 소비자 단체, 농어업인 단체, 자영업자 단체 등은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논의되는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역시 비전문가의 참여를 최소화하고, 의료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
다만, 의료법 제52조에 따른 의료기관 단체인 대한병원협회는 병원 경영자들로 구성된 사용자 단체로, 국민 의료비 상승보다는 인건비 절감을 통한 병원 이익 확대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공의를 노동력으로 간주하여 근로시간 단축을 반대하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즉 대한병원협회는 의사보다는 경영인 혹은 사용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며 앞서 언급한 과반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에 따라 설립된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전공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경영자 및 중간 관리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위원 13인 중 전공의는 2인에 불과하며, 위원장 역시 대부분 병원장이 맡아 왔다. 이로 인해 전공의들은 여전히 주 80시간 이상의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서도 대한병원협회를 포함한 사용자 단체를 과반에 포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강선우 의원 안의 경우, 의료법 제52조에 따른 의료기관단체, 즉 대한병원협회를 포함하여 의사 과반을 구성하고 있지만 이는 최소한 서명옥 의원의 안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사 수급 추계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위원회의 전문성을 보장해야 한다.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인 위원회 운영이 필수적이며 정부 및 비전문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또한, 사용자 단체는 병원 경영 상 이해관계로 인해 의료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의 관점과 상충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 단체를 제외한 전문가 위원이 전체 과반을 차지하도록 구성해야 한다.
셋
절차는 투명해야 한다.
일본은 의사수급분과회의 회의 자료와 회의록을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회의록을 포함한 원자료, 연구 결과, 논의 과정, 정책 제안 등 모든 자료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회의록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참여하는 위원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신뢰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다. 2024년 8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교육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오석환 교육부 차관이 “배정심사위원회 협의 내용을 파기했다.”고 발언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후 교육부는 배정심사위원회 위원 명단과 회의록 공개 요청을 끝까지 거부했고, 보건복지부 역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록 공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법원의 요구에 따라 회의록이 공개되었으나, 정부가 논의 내용을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불신이 더욱 깊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10시 30분경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이후 발표된 포고령 제1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이후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일단락되었고, 이후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계엄과 관련된 국무회의록 제출을 요구했으나, 회의록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포고령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작성되었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배정심사위원회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투명하게 운영되었다면 이러한 혼란은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 뿐만 아니라 배정심사위원회,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의 모든 회의록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과 마찬가지로 회의록 미작성 및 미공개에 대해 징역 또는 벌금 등의 벌칙 조항을 명시해야 한다.
넷
수급 추계 결과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일본과 네덜란드 등 선진국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며 이들이 도출한 결과를 정책에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의료 체계를 운영하며, 의료 전문가들의 제언을 지속적으로 무시해왔다. 소송 부담 완화, 합리적인 보상 구조 마련,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중증·외상·응급·분만·소아 등 특정 분야 기피 문제는 수십 년 전부터 의료계가 꾸준히 제기해온 사안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외면한 채, 대형 병원·제약 회사·보험사 등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며 의료 체계를 더욱 왜곡시켜왔다. 지난 과거 사례를 볼 때, 정부가 이번에도 관료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며 전문가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의정 협의체와 같이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이러한 구태에서 벗어나, 전문가 중심의 정책 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다양한 변수와 모형을 결정하고, 연구자를 선정하며, 최종 결과를 분석하여 정책을 제안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수급추계위원회의 결정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의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적 구속력을 마련해야 하며, 특히 이번 사태처럼 정부가 보건정책심의위원회와 배정심의위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또한, 법 체계상 의대 정원 조정에 대한 결정권은 고등교육법과 교육부 소관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고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의사 수급 추계 결과가 직접 반영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의료 정책은 전문가의 분석과 예측을 기반으로 과학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며, 정부는 이를 존중하고 실행해야 한다.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전문가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맺음
의사 수급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의사 수급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의료 이용 형태 변화, 의료 전달체계, 의학 교육 및 졸업 후 교육 등 다각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단순한 숫자 계산만 할 것이 아니라 미래 의료 환경을 예측하고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의사 수급 문제는 국가 의료 체계의 근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정책 수립에 앞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의료비 부담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의사 수급의 적정 기준을 설정하고, 의료의 질과 보장성 등을 고려한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특정 기피 분야의 의사가 부족하다고 정원만 늘릴 것이 아니라, 필수 의료 지역 의료의 유인책 마련, 의료 전달 체계 개선 등 종합적인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 수급 추계를 담당하는 미국 보건의료자원서비스청(Health Resources and Services Administration, HRSA)의 보건 인력국(Bureau of Health Workforce, BHW)은 전체 의사 수급 추계뿐만 아니라 전공별 전문의 수급, 의과대학 및 졸업 후 교육, 구직 지원 등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을 담당한다. 미국 보건의료자원서비스청의 전체 직원 수는 2,641명, 연간 예산 22조 원 이상의 대규모 조직이다. 이 중 보건 인력국의 예산만 약 3조 7천억 원에 달한다. 의사 수급을 추계하는 것이 단순한 산술 계산이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와 정책 지원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사 수급 추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직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이에 필요한 예산은 얼마나 마련할 것인지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지속해야 한다.
끝으로,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립은 대한전공의협의회의 일곱 가지 요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업무개시명령 폐지 등 다른 요구안에 대한 논의도 조속히 진행되길 바라며, 이번 의사수급추계위원회 논의가 하나의 정책 변화에 그치지 않고, 왜곡된 의료 환경을 바로잡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2024년 2월 20일 일곱 가지 요구안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과학적인 의사 수급 추계를 위한 기구를 설치하고 증원과 감원을 같이 논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1년이나 지났지만 이제라도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에 입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서론
과학적으로 의사 수급을 추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설, 변수, 모형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의사 수급을 추계할 기관 혹은 연구자를 선정해야 한다. 추계된 결과를 검토하여 정책에 반영할 것인지 수정할 것인지 논의 후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 결과가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의료 수요와 필요, 그리고 공급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얼마만큼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것인지 그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은 얼마나 지불할 것인지 등의 사회적 합의가 수반되어야 하며, 이러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보건 의료정책과 의사 수급에 대한 방향성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료 수요와 의료 비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의사 수급을 추계해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를 구성하기 앞서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했다. 의약분업 사태가 있었던 2000년, 보건의료기본법이 제정되었다. 보건의료기본법 제15조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건의료발전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여야 한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보건복지부는 보건의료 발전계획을 단 한 차례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역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사상 첫 회의가 개최되었다. 보건의료기본법 상 보건의료발전계획에는 먼저 기본 목표와 추진 방향이 포함되어야 한다. 즉, 의료 수요·필요·공급에 대한 사회적 합의부터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 이미 법에 명시되어 있었지만 그간 정부는 직무를 유기한 셈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반목해온 의정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는 그간 당연 지정제와 단일 보험을 기반으로 의료 공급자를 통제하는 정책만을 고수해왔다. 더불어 정부는 의사들이 이윤 추구에만 몰두한다고 오도했다. 불합리한 의사 결정 구조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는 원가 이하의 의료비를 강요하고 있다. 현 사태와 관련하여 2020년 의정 합의를 준수하지 않았고, 전공의에게는 여전히 주 72시간 근무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제는 비급여 진료마저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의약분업, 문재인 케어, 의학전문대학원 전환, 의대 정원 확대까지 모두 의료계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행했으며, 정책 실패의 원인을 의료계로 돌렸다. 정부를 향한 의료계의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 수급을 추계하기 위해서는 의료 이용, 인력 분배 등 다양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의사수급추계위원회 구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된 바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 국한하여 최소한의 요건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나
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구로 운영되어야 한다. 2024년 10월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의료인력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for Medical Manpower Planning, ACMMP)의 전문가들 역시 정부의 개입 없이 독립적으로 의료 인력 수급을 추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은 이러한 독립성과 거리가 멀다. 지난 2024년 2월 6일 오후 2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실질적인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 결정을 통보하는 수준에 그쳤다. 불과 1시간 후인 오후 3시, 조규홍 장관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정책을 발표했다. 1시간 남짓한 논의 끝에 결정된 이 정책은 의료 인력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할 때,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와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법안들은 의사 수급 추계를 심의 의결하는 위원회를 보건복지부 산하에 두고, 위원장 역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거나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위원회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의사 수급추계위원회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출한 결과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 상위 의결 기구에서 다시 심의·의결하는 구조에서는 정부가 그 결과를 무시하거나 수정하여 임의로 결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서명옥, 안상훈 의원의 보건의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의사 수급 추계를 정부 출연기관이나 공공기관이 담당하도록 고정하고 있다. 즉, 정부 산하 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수급 추계를 위탁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정부의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의사 수급 추계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나 연구자가 수행해야 하며, 수급 추계 기관 및 연구자 선정 과정 또한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서 전문가들과 논의하여 결정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또 하나의 사례로,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대한병원협회가 운영을 위탁받고 있으며, 위원장과 위원 모두 보건복지부 장관이 임명하는 구조다. 보건복지부 및 대한병원협회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채 운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공의 노동력 착취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역시 같은 이유로 수련환경평가위원회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역시 정부의 개입을 없애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의료 인력 수급 추계를 위해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의사수급추계위원회의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 산하가 아닌 민간 기구로 운영해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정부 산하 기관이 아닌 민간 기구로 운영되어야 한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사례를 보면 민간 주도의 독립적 운영이 충분히 가능함을 알 수 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한국의학교육협의회가 주축이 되어 민간에서 시작했으며, 현재까지 정부와 의료계 양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사회는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뿐만 아니라 교육·언론·법조계 등의 공익 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고등교육법 및 하위 시행령을 통해 조직과 평가 인증의 법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세계의학교육연합회(World federation for Medical Education, WFME)의 평가 인증 기준을 도입하여 의학교육 평가·인증 기관으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국내 의학 교육 선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전문가 중심으로 민간 자율로 운영되는 기구의 모범적인 사례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간 자율 운영이 가능하다. 정부가 과학적인 추계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료(raw data) 제공 및 예산 지원 등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전문가들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하고, 위원회의 심의·의결 결과를 정책에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되고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 운영이 보장될 때, 의사 수급 추계가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정부 산하 기관이 아닌 독립적인 민간 기구로 운영되어야 한다.
둘
의사 수급 추계는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서는 가설 설정, 변수 결정, 모형 구축, 연구 기관 선정, 결과 검토, 정책 제안 등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다. 특히 변수 설정은 의사 수급 추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연구 논문에서도 근무일수 설정에 따라 의사 수 추계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네덜란드의 의료인력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for Medical Manpower Planning, ACMMP)의 사례를 보면, 근무 시간, 근무 형태, 성비, 외국인 의사 유입, 은퇴 연령, 미래 의료 수요 변화 등 50개 이상의 변수 분석하여 추계를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수급 추계를 위해서는 위원들의 충분한 전문성과 현장 경험을 갖추어야 한다.
위원회의 과반을 의사로 구성해야 한다.
의료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이 배제되면 불신과 갈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불합리한 의사 결정 구조다. 이 위원회는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한국소기업소상공인연합회, 농협중앙회, 전국민주 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25인으로 구성되지만, 대한의사협회의 참여 위원은 고작 2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조에서 의료 현장의 목소리가 적절히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의료 행위의 원가 보전율은 여전히 70~8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중증외상센터의 경우, 사람을 살릴수록 적자가 발생하는 구조가 지속되면서 이국종 아주대학교병원 외상외과 교수가 병원을 떠났고, 최근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은 중증외상 전문의 수련 센터 운영을 중단했다. 결국, 의료 전문가의 의견이 배제된 정책 결정 과정이 필수 의료 분야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다.?
일본 의사수급분과회는 전체 22명의 위원 중 16인을 의사로 구성하여 전문가 중심의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 결과를 존중한다. 주목할 점은 일본과 네덜란드 모두 정부뿐만 아니라 환자 단체, 시민 단체, 소비자 단체, 농어업인 단체, 자영업자 단체 등은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논의되는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역시 비전문가의 참여를 최소화하고, 의료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
다만, 의료법 제52조에 따른 의료기관 단체인 대한병원협회는 병원 경영자들로 구성된 사용자 단체로, 국민 의료비 상승보다는 인건비 절감을 통한 병원 이익 확대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공의를 노동력으로 간주하여 근로시간 단축을 반대하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즉 대한병원협회는 의사보다는 경영인 혹은 사용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며 앞서 언급한 과반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에 따라 설립된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전공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경영자 및 중간 관리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위원 13인 중 전공의는 2인에 불과하며, 위원장 역시 대부분 병원장이 맡아 왔다. 이로 인해 전공의들은 여전히 주 80시간 이상의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에서도 대한병원협회를 포함한 사용자 단체를 과반에 포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강선우 의원 안의 경우, 의료법 제52조에 따른 의료기관단체, 즉 대한병원협회를 포함하여 의사 과반을 구성하고 있지만 이는 최소한 서명옥 의원의 안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사 수급 추계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위원회의 전문성을 보장해야 한다.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인 위원회 운영이 필수적이며 정부 및 비전문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또한, 사용자 단체는 병원 경영 상 이해관계로 인해 의료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의 관점과 상충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 단체를 제외한 전문가 위원이 전체 과반을 차지하도록 구성해야 한다.
셋
절차는 투명해야 한다.
일본은 의사수급분과회의 회의 자료와 회의록을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회의록을 포함한 원자료, 연구 결과, 논의 과정, 정책 제안 등 모든 자료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회의록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참여하는 위원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신뢰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다. 2024년 8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교육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오석환 교육부 차관이 “배정심사위원회 협의 내용을 파기했다.”고 발언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후 교육부는 배정심사위원회 위원 명단과 회의록 공개 요청을 끝까지 거부했고, 보건복지부 역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록 공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법원의 요구에 따라 회의록이 공개되었으나, 정부가 논의 내용을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불신이 더욱 깊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10시 30분경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이후 발표된 포고령 제1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이후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일단락되었고, 이후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계엄과 관련된 국무회의록 제출을 요구했으나, 회의록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포고령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작성되었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배정심사위원회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투명하게 운영되었다면 이러한 혼란은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 뿐만 아니라 배정심사위원회,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의 모든 회의록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과 마찬가지로 회의록 미작성 및 미공개에 대해 징역 또는 벌금 등의 벌칙 조항을 명시해야 한다.
넷
수급 추계 결과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일본과 네덜란드 등 선진국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며 이들이 도출한 결과를 정책에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의료 체계를 운영하며, 의료 전문가들의 제언을 지속적으로 무시해왔다. 소송 부담 완화, 합리적인 보상 구조 마련,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중증·외상·응급·분만·소아 등 특정 분야 기피 문제는 수십 년 전부터 의료계가 꾸준히 제기해온 사안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외면한 채, 대형 병원·제약 회사·보험사 등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며 의료 체계를 더욱 왜곡시켜왔다. 지난 과거 사례를 볼 때, 정부가 이번에도 관료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며 전문가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의정 협의체와 같이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이러한 구태에서 벗어나, 전문가 중심의 정책 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사수급추계위원회는 다양한 변수와 모형을 결정하고, 연구자를 선정하며, 최종 결과를 분석하여 정책을 제안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수급추계위원회의 결정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의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적 구속력을 마련해야 하며, 특히 이번 사태처럼 정부가 보건정책심의위원회와 배정심의위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또한, 법 체계상 의대 정원 조정에 대한 결정권은 고등교육법과 교육부 소관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고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의사 수급 추계 결과가 직접 반영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의료 정책은 전문가의 분석과 예측을 기반으로 과학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며, 정부는 이를 존중하고 실행해야 한다.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전문가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맺음
의사 수급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의사 수급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의료 이용 형태 변화, 의료 전달체계, 의학 교육 및 졸업 후 교육 등 다각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단순한 숫자 계산만 할 것이 아니라 미래 의료 환경을 예측하고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의사 수급 문제는 국가 의료 체계의 근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정책 수립에 앞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의료비 부담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의사 수급의 적정 기준을 설정하고, 의료의 질과 보장성 등을 고려한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특정 기피 분야의 의사가 부족하다고 정원만 늘릴 것이 아니라, 필수 의료 지역 의료의 유인책 마련, 의료 전달 체계 개선 등 종합적인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 수급 추계를 담당하는 미국 보건의료자원서비스청(Health Resources and Services Administration, HRSA)의 보건 인력국(Bureau of Health Workforce, BHW)은 전체 의사 수급 추계뿐만 아니라 전공별 전문의 수급, 의과대학 및 졸업 후 교육, 구직 지원 등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을 담당한다. 미국 보건의료자원서비스청의 전체 직원 수는 2,641명, 연간 예산 22조 원 이상의 대규모 조직이다. 이 중 보건 인력국의 예산만 약 3조 7천억 원에 달한다. 의사 수급을 추계하는 것이 단순한 산술 계산이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와 정책 지원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사 수급 추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직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이에 필요한 예산은 얼마나 마련할 것인지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지속해야 한다.
끝으로,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립은 대한전공의협의회의 일곱 가지 요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업무개시명령 폐지 등 다른 요구안에 대한 논의도 조속히 진행되길 바라며, 이번 의사수급추계위원회 논의가 하나의 정책 변화에 그치지 않고, 왜곡된 의료 환경을 바로잡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2025년 2월 13일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